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 천양희, <오래된 농담>
우리는나이를 먹는다. 어느덧 내가 부모님의 나이가 되었다.
무촌인 부부사이는 콩깍지 씌인 사랑으로 시작해 의리와 정으로 유지된다.
유고적 질서와 씨족사회의 유물인 촌수는 애초부터 부부사이엔 무의미하다.
김광석의 '60대 늙은 부부의 이야기'나, 이장희의 '내 나이 60에는'도
슬프지만 아름답다.
모든 저무는 것은 슬프다.
하지만 황혼은 아름답다.
노을과 석양은 나를 경컨케 한다.
천양희 시인의 약력 및 작품 세계
1. 약력
천양희(千良姬) 시인은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특유의 서정성과 철학적 사유가 깊이 배어 있는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과 구원을 탐구하는 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 대표작
- 《마음의 수수밭》(1979)
- 《분홍에 저린 손을 넣고》(1985)
- 《바늘 구멍 속의 폭풍》(1994)
- 《오래된 골목》(2003)
- 《천 개의 눈》(2007)
- 《나는 슬픔에게 강하다》(2011)
3. 작품 세계
천양희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은 슬픔과 고독을 성찰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특히 짧고 간결한 언어 속에 압축된 정서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며,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의 시에는 절제된 표현 속에서도 강한 정서적 울림이 있으며, 삶의 모순과 고통을 통과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시적 태도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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