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업,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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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도의 기울기란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

알 수 없는 자력이 몸을 곧추세운다

그냥 밟고만 있어도

높이가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굳이 거슬러 내려가지 않고

계단의 물결에 발을 맡길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

한 계단씩 베먹은 사람들의 높은 입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습관처럼 입을 벌린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떠 있는 현기증

어떤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면 쓸쓸한 법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넘치지 않는 저울질로 평등하게 내려놓고

빈 계단만 층층층 접히는 지평선

맞물린 관계 속에

서로 먹고 먹히는 다정함의 세계여

기울어진 생계들을 떠안고

흙이 묻지 않는 보법(步法)으로

반복되는 생성소멸

오늘밤

달은 여전히 발자국 없이 길을 갈 것이다

 

 - 김희업,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김희업 시인(1961년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독특한 상상력과 언어 감각으로 주목받는 시인입니다.

 

주요 작품

  • 《칼 회고전》
  • 첫 시집으로, 상처로 얼룩진 고독한 몸의 세계와 존재에 깃든 고통과 억압의 역사를 탐색합니다.
  • 《비의 목록》
  • 두 번째 시집으로, 삶의 이면을 내밀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사물과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관조와 성찰의 시편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집으로 제17회 천상병시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 세계

김희업 시인의 시는 고독과 상처의 일상 너머를 예리하게 투시하며 새로운 시적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리얼리스트적 상상력이 특징입니다. 그는 일상을 냉정히 응시하며, 상처와 고독을 오래 감수한 자가 외마디 비명도 없이 그것을 담담한 생의지로 전환시키는 건강하고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시는 삶의 이면을 내밀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언어적 기지를 살려 사물과 삶의 중핵을 파고드는 관조와 성찰의 시편들을 선보입니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천상병 시인이 추구한 비타협의 시정신과 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김희업 시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삶의 깊이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며, 그의 독특한 시 세계는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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