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엄마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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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언제부턴가 진주에 장기 출장가 계신 아빠 모르게 엄마는 일을 나가셨다. 오늘처럼 주룩주룩 비가 계속 내리는 오후 학교를 일찍 파한 나는 집 창틀에 걸터 앉아 로보트태권브이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기다렸다.
봉일시장 버스 정류장을 지나 복개천길을 걸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 레시버를 귀에 꽂고 mbc청룡 유승안 선수가 대타로 나와 홈런을 쳐서 경기를 뒤엎는 함성을 들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나의 유년 시절 엄마는 늘 기다리는 존재였다.
이윽고, 엄마는 냄새를 안고 온다.
엄마는 달빛을 이고 온다.
엄마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숱이 듬성해져 외출할때는 가발을 쓰시는 엄마는 이제 나를 기다린다. 시골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자식을 기다린다. 자식의 자식을 기다린다. 자식의 냄새를 그리워 한다.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마른땅을 적신다. 먼지처럼 부서지던 흙들이 엉기며 배곯던 시절 엄마냄새를 소환해 온다.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 온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기형도 시인 – 약력과 작품 세계


1. 기형도 시인의 약력

기형도(奇亨度, 1960~1989)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이자, 1980년대의 시대적 감수성을 강렬하게 표현한 시인이다.

  • 출생: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현재 인천광역시 연평도)
  • 학력: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직업: 시인, 언론인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
  • 등단: 1985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 〈안개〉, 〈극락조〉 등을 발표하며 등단
  • 사망: 1989년 3월 7일, 서울 피카디리극장에서 심장마비로 돌연사

기형도는 짧은 생애 동안 단 한 권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 을 남기고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한국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대표작과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1989)
    •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이자 대표작.
    • 1989년 출간되었으며, 죽음과 도시적 고독을 깊이 탐색한 작품들이 수록됨.
    • 한국 문단에서 ‘고독의 시인’, ‘죽음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한 작품.

대표 시

  1. 〈안개〉 – 몽환적이고 불확실한 도시적 감성을 담아냄.
  2. 〈엄마 걱정〉 –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느낀 고독과 슬픔을 회상.
  3. 〈빈집〉 – 도시적 고독과 공허함을 강렬하게 표현.
  4. 〈정거장에서의 충고〉 – 현대인의 방황과 소외를 형상화.
  5. 〈질투는 나의 힘〉 – 삶의 부조리와 불안을 냉소적 어조로 묘사.

3. 기형도의 작품 세계

1) 도시적 고독과 소외

기형도의 시에는 현대 도시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고독이 짙게 깔려 있다. 특히 그의 시 속 인물들은 종종 길거리, 극장, 정거장, 빈집 같은 공간에서 홀로 남겨진 존재들로 묘사된다. 이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반영한다.

"나는 유리창 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어두워지는 거리에 나의 가난한 그림자"
— 〈빈집〉 중에서

2) 죽음과 불안의 이미지

그의 시에는 죽음, 질병, 상실에 대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형도는 생의 불확실성과 존재의 무게를 불안하고 서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 그는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인간이 맞닥뜨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했다.

"나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 / 그러나 살아남은 자는 누구인가"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3) 비유와 상징을 통한 초현실적 표현

기형도의 시는 현실과 초현실이 혼재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낯설고 기이한 분위기로 변주되며, 불안과 공포를 자아낸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안개', '검은 잎', '유리창', '빈집'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4) 개인적 상처와 사회적 현실의 결합

기형도의 시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적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지식인의 불안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4. 기형도의 문학적 영향과 의의

기형도의 시는 단 한 권의 시집으로 한국 현대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80년대 민중문학의 강한 정치적 색채와는 다른 개인적 고독과 내면의 세계를 깊이 탐색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이후 한국 문학에서 도시적 감수성과 개인적 불안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고독의 미학’, **‘불안과 상실의 정서’**를 깊이 탐구하는 현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형도의 시가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한 개인의 내면적 고독과 방황을 강렬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방황했으나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5. 결론 – 기형도의 시가 주는 의미

기형도의 시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가장 서정적이고도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들로,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죽음과 도시적 소외를 강렬한 이미지와 초현실적 감각으로 그려내며,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시는 상실과 불안 속에서도 언어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그것이 기형도의 시가 여전히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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